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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뽑은 일본의 영웅들......

ssarang 2008. 7. 25. 08:49
일본인이 뽑은 일본의 영웅들......

(1) さかもと りょうま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1867)
지금의 고치(高知)縣 출신. 남녀노소·직업·학력을 불문하고 언제나 영웅서열 1위를 차지하는 국민적 영웅이다.
메이지 혁명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에도(江戶)막부를 쓰러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츠마(薩摩)와 쵸슈(長州)의 연합, 이른바 [삿쵸(薩長) 동맹]을 비밀리에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혁명직전인 1867년 33세의 생일날에 막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되었다.
동분서주하며 파란만장한 짧은 삶 속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낸 혁명가였기에
그를 서열 1위에 올려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료마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기발한 발상, 탁월한 협상력과 실행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서구의 서세동점의 시대적 배경하에서 일본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고 국가위기를 구원해준 구세주로 추앙되고 있으며,
오늘날 일본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 경제의 침체 등과 맞물려 료마 같은 정치리더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고액권이 발행될 경우 그 사진의 인물로 꼽아 놓고 있다고 한다.


(2) とくがわ いえやす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 전국시대 무장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3) おだ のぶなが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전국시대 무장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4) たなか かくえ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榮)(1918-1993)
중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학벌의 텃세가 드센 일본정계에서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록히드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사건으로 감옥살이까지 했음에도 4위에 오른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으나,
탁월한 리더십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킨 정치력을 인정받은 것 같다.
또한 그의 딸이 아버지 못지 않게 장관으로 국회의원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어 부친의 후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5) よしだ しげる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1878-1967)
태평양전쟁중 상공장관을 역임한 전력으로 전쟁후 전범으로 몰렸으나,
전쟁중 미국과 영국에 대해 호의적인 소위 친영미파였기 때문에 군부와 대립했던 연고로 구제되어 외상을 거쳐 수상을 역임했다.
패전후 7년동안 정권을 담당하면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고,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을 성사시키는 등 전후처리에 정치력을 발휘하여 오늘날 대국 일본의 기초를 마련했다.


(6)とよとみ ひでよし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전쟁중에  병사하였다.


(7) ふくざわ ゆきち 후꾸자와 유기찌 (福澤諭吉) (1835-1901) 메이지시대 계몽사상가
일본의 지폐 1萬円券 사진의 주인공으로, 지금의 오이타(大分)縣 출신.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1860년 각료의 미국방문시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서구 문화를 체험한 후
[學問のススメ] [西洋事情] 등의 책을 써서 일본국민을 계몽시키고,
일본최초의 대학인 게이오(慶應義塾)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분야에 헌신했다.
그러나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 時事新報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논리를 펴서 조선을 능멸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박영효 등이 망명해 오자 자신의 집에서 기거토록 배려하는 등
간접적으로 조선의 내정에도 간여했다.
자국민에게는 [天は人の上に人をつくらず, 人の下に人をつくらずといえり]
즉,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민권운동가였지만,
아시아국가의 민권은 멸시한 것으로 유명하고, 언제나 일본식 옷을 고집한 국수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청일전쟁을 앞두고 승리에 대한 회의감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에 대해
일본민족의 강인함을 보여주자며 개전 무드로 전환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계몽·교육분야에서 선발한다면 당연히 1위를 차지할 인물이다.


(8)さいごう たかもり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1827-1877) 메이지시대 혁명가
가고시마(鹿兒島)출신으로 메이지 혁명 당시(1868년)에는 막부 토벌군의 참모장으로 야전군을 총지휘했다.
[유신 3걸]의 필두. 초기 메이지 정부의 수반으로 版籍奉還·廢藩置縣 등의 정치적 개혁을 주도했으나,
1873년 조선을 정벌하자는 자신의 정한론(征韓論)이 반대파에 의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했다.
1877년에는 옛 무사들에게 옹립되어 [세이난(西南)전쟁]을 일으켰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에 의해 패퇴하여 할복자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2년후 강화도사건을 거쳐 한일합방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의 친동생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는 초대 대만총독을 역임했다.


(9) いちかわ ふさえ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江)(1893-1981) 쇼와시대 여성정치가
아이치(愛知)縣 출신의 여권운동가.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부인참정권 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10위안에 든 것은 최근 여권의 지위향상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배려로 상징적인 의미로 뽑아 준 것 같다.


(10) いとう ひろぶみ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메이지시대 정치가
야마구치(山口)縣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탈취한 주인공이자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으며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다.
20대에 영국에 유학한 경험으로 영국과의 전쟁시에는 일본에 불려와 영어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본최초의 내각총리를 역임했으며, 메이지 헌법의 제정을 주도한 인물로 정계의 원로로서 오랫동안 군림했다.


(11) たけだ しんげん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 전국시대 무장
전국시대 일류의 전략·전술가로 지금의 야마나시(山梨) 지방을 지배한 인물이다.
[風林火山]의 깃발을 내건 기마대는 용맹하기로 유명했으며,
호적수 우에스기(上杉 謙信)와의 전투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병으로 죽게되자 3년동안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가케무샤(影武者)를 내세우도록 유언을 남기고 53세의 생을 마감했다.
작년에 상영되었던 일본영화 影武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2) うえすぎ けんしん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1530-1578)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과 쌍벽을 이루는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중북부 일본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나가오(長尾)가문의 가독(家督)을 이은 겐신은 에치고지방을 평정했다.
전국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정도(正道)를 걸은 인물」 겐신은 의(義)를 중시했고,
결코 도를 벗어나는행동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발 빠르게 한 시대를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 겐신에게는 연중행사 처럼 매년 전투를 즐기는 습관 또한 있었으며,
그 상대가 바로 일본 전국시대상 최고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다께다 신겐과의 전투이다.
신겐 과는 나카카와지마에서 12년간 5차례 대치했다.
신겐의 사망소식이 도달했을 때, 식사중이었던 겐신은 먹던 음식을 모두 토하고
「 아아... 다년의 호적수와 다시 만날 날은 이제 없단 말인가」 라고 한탄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1578년. 다음 목표인 관동지방 출진을 눈 앞에 둔 3월 9일...
겐신은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 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인 상태로 13일에 사망했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던 것이 원인으로,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죽기 한 달 전에 남긴 한시(漢詩)에
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49년은 한순간의 꿈, 생을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르니,
세월 또한 꿈과 같구나』라는 글귀가 있다.


(13) みなもとの よりとも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 가마쿠라 무장
일본 최초의 무가정권인 가마쿠라(鎌倉)막부를 창설하고 초대 쇼군(將軍)이 된 인물.


(14) おおくぼ としみち사이고 다카모리(大久保利通)(1830-78) 메이지시대 정치가
가고시마(鹿兒島)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3걸.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한 후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으로 일컬어지는 근대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인물.
사족들의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는 등 독재와 냉혈 인간으로 불려졌는데 결국 불평무사에게 암살당했다.


(15) うえすぎ ようざん우에스기 요오잔(上杉 鷹山)(1751-1822) 에도 후기 요네자와(米澤)의 번주(藩主).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불씨]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의 주인공인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선정을 베푼 명군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우에스기 하루노리(上杉治憲)라고 한다.


(16) みなもとの よしつね미나모토 요시츠네(源 義經)(1159-1189) 가마쿠라 무장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를 도와 정권을 수립했으나 형과 불화하고 쫓겨다니다가 자살했다.
무예에 출중한 비극의 영웅으로 동정적이고 과장된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가부키의 테마로 곧잘 등장한다. 심지어 칭기스칸으로 부활하여 몽고제국을 세웠다는 속설마저 생겨났다.


(17) いたがき たいすけ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1837-1919) 메이지시대 정치가
지금의 고치(高知)縣 출신으로 정한론쟁에서 밀려난 후, 자유민권운동가로 전향했다.
1882년 연설도중 괴한에게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며,
뒤에 내무상을 역임했다.


(18) よしだ しょういん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막부말기 사상혁명가
지금의 야마구치(山口)縣 출신으로 페리함대에 밀항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붙잡혀 투옥되었다.
출옥 후 쇼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학당을 세우고 젊은 인재를 양성했는데
伊藤博文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모두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막부를 타도운동이 발각되어 30세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가 옥중에서 쓴 幽囚錄에서는 조선을 공략해 영토를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도 일본의 우익주의자들은 매년 10월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19) かつ かいしゅう 카츠 카이슈(勝海舟) (1823-1899) 막부말기 군인정치가
막부의 해군경으로 조약을 비준하기 방미한 후, 문화 충격을 받고 해군력 증강과 개항을 주장했다.
이에 분노를 느낀 사카모토 료마가 그를 죽이러 찾아갔다가 오히려 설복당하고 제자로 받아줄 것을고 간청했으며,
그때까지의 보수적인 사상을 떨치고 혁명가로 변신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가 에도성에 진격해 왔을 때 전면전 일보직전에 자신의 상전인 쇼군과 적장 사이고를 설득하여
성문을 열어 무혈혁명으로 이끌어내고 아울러 쇼군에 대한 신변보장도 받아냈다.


(20) おざき ゆきお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1859-1954) 메이지쇼와 정치가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헌정을 수호한 호헌주의자로 [憲政の神樣]으로 불린다.
중의원의원 25회라는 불후의 기록을 남겼다.




일본인 스스로 뽑은 20명의 일본 영웅들을 살펴보며서
특이한 점 몇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번째로 덴노가 한명도 없다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이 당연히 들어가겠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일본에서의 덴노(天皇)의 성격을 또 한번 엿 볼수 있겠지요.

둘째로 전국시대 이전(AD1500년)의 인물이 단 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고..
그 순위도 20명중에서 한참 뒤라는 사실이지요..
즉 일본인들이 일본 역사 고대사에 대한 선호도가 그만큼 약하다..또는
고대사의 인물에게서 일본혼의 자취를 그리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지지요..

셋째로 전국시대 3웅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간단히 10위권안에 랭킹이 되었고..

넷째로 현대 일본의 수상이 두명이나 그것도 5위권에 랭킹되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일본 자민당 정부의 장기집권을 설명해주고 있지요..

다섯째로 20명중 거의 절반인 9명이 막부 말기~메이지시대의 일본 근대화의
족적을 남긴 사상가와 정치가란 사실입니다.
같은 시기 조선의 인물들이 (고종황제,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
현재 우리 국민들에게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 대비해보면 시사하는바가 무척 크지요..